필립 자루스키 - 홀려버리다
2014.05.01 감상
처음으로 클래식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50분이 지 멋대로 흘러가버렸다. 최근에 본 공연 중에 제일 집중해서 봤다. 음악은 참 무섭다. 말 그대로 홀려버렸다. 괜히 파리넬리가 노래 부를 때 여자들이 기절하는 게 아니다. 너무 멋있다. 아 너무 아름답다. 사람들이 이렇게 조용히 듣고 숨 죽이며 있다가 브라보 하면서 박수 치는 것을 본 것도 LG아트센터에서 손에 꼽힌다. 음악이란 정말 무섭다는 생각이 또 든다. 괜히 세이렌의 전설이 있는 게 아니다. 처음에는 예전에 유튜브로 봤을 때 처럼 저런 목소리가 나오는 게 '혐오스럽다'라는 생각도 들었는데 그런 생각은 3분만에 사라졌다. 정말 근래에 이렇게 집중해서 무언가에 빠져든 적이 없다. 클래식은 아무리 들어도 모르는 곡이면 지루해지기 마련인데 정신차리고 보니 이미 1부가 지나가 있어서 깜짝 놀랐다. 너무 아름답다.
아주 자세히 관찰하고 싶었으나 눈이 흐려져서 자꾸 손에 눈이 가다가 아주 멍하니 입 벌리고 계속 뚫어져라 쳐다보고 듣고 음미했다. 처음에는 긴장하셨는지 버릇인지 왼손은 허벅지에 대고 오른손은 가볍게 주먹을 쥐고 시작하시더니 그 다음에는 안 그러신다. 정말 뭐라고 해야 하나. 오케스트라도 끝내줬다. 가족 같은 분위기의 베니스 바로크 오케스트라. 수석 바이올린니스트의 포스도 멋졌고 가운데서 류트 키는 할아버지가 참 귀여웠다. 첼로 두 명이 하는데 두 명은 형제 같고 류트는 삼촌 같고 즐겁게 가족 같이 연주하시는데 오케스트라는 보는 맛이 정말 좋다. 쟤가 키니까 그 다음에는 재가 키고 그리고 리듬에 맞춰 음악을 즐기면서 연주하는 모습이 보여서 연주가 3번 나오는 내내 계속 눈을 왔다갔다 연주를 들었다. 연주도 굉장!
그리고 자루스키 형님이 나오실 때 마다 수석 바이올린니스트가 무대 오른쪽을 바라보시는게 얼마나 정겹던지. 완전 훤칠 하시다. 원래도 훤칠하실 것으로 예상했지만 감히 78년생이면 우리나라 나이로 37살이신데 전혀 그렇게 안 보이고 정말 소년 같다. 키도 뭔가 포즈도 소년 같다. 자루스키의 말 처럼 "사람들은 카운터테너를 제3의 성이라거나 반여성이라고 말하지만, 제가 보기엔 어린 아이에 머무르는 방식에 더 가깝다고 생각해요." 그 순수함이 강조될 때 마다 정말 말 없이 넋을 잃고 무대를 바라보았다. 첫 타임에서는 두 번째 곡, 헨델 엄청났다. 미리 찾아보고 가니까 팬들은 자루스키 목소리가 가벼운 편이라 본인도 헨델을 잘 하고 싶어하지만 한국에서 공연할 때는 비발디가 더 나을 거라고 하는데 와 헨델.. 오페라 <알치나> 중 '달콤한 정열이 나를 유혹하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 지조차 모르고 들었어!!!! 그리고 마지막 곡 '차가운 카스피 해의 진창에서' 곡은 매우 힘찬 곡이었지만 그 마무리가 너무나 정말 이건 음을 들으면서 계속 음을 형상화시켜봤는데 그야말로 한조각 구름이다.
이게 바로 사람 홀리는 목소리. 기억도 안나. 그런데 정말 너무너무너무 시간이 빨리 지나가서 듣고 있는 와중에 음 하나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무진장 애 썼다. 인터미션 끝나고 노래 하나는 바로 인트로에서 지른 음색이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곡 전체의 서정적이고 비장한 분위기가 너무나 잘 살아났다. 그리고 바로크 오케스트라가 연주 안하고 자루스키가 혼자 노래 부를 때는 엄마야 저게 사람이여 넋이 나가버린다. 레코딩으로 듣는 거랑 다르다. 레코딩 레코딩도 좋은데 와, 정말 라이브로 들으니까 너무나 행복했다. 이 감정은 행복함 보다는 아름다운 것, 숭고한 것 앞에서 갖는 감사의 감정, 이런 세상도 있구나, 세상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 있구나, 내가 잊고 있었구나, 이런 플래시백. 그 무반주 음색과 가끔 들려주는 순수무첨가구름한조각 같은 음색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사실 평일 8시 공연이라. 역삼역 까지 가는데 1시간 반, 넉넉잡아 2시간이니 6시에 퇴근해야 하는데 불가능이다. 사실 오늘 퇴근은 내일 출근을 담보로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너무나 만족스러워서 또 듣고 싶다.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리고 음악 들으면서 운 것도 정말 내 머리털 나고 거의 없었던 적인데 거의 눈시울을 붉히면서 듣다가 - 너무 아름다워서 ㅡ 결국 울었다. 모든 단원들과 자루스키는 노랑리본을 달고 나왔다. 그리고 첫 앵콜 곡으로 세월호 참사에 대한 위로로 이 곡을 보낸다고 하고 '울게하소서'를 불렀다. 음악을 듣고 이렇게 울 수 있구나 싶다. 난 요새 내 머리가 너무 돌아가서 램 기능 상실로 인해 생각 안해도 되는 회사일을 계속 리플레이해서 생각해서 스트레스 받는다. 하지만 한편 계속 무의식적으로 잊고 싶은 건 잊고 묻어버린다. 그 어딘가에 묻어버린다. 세상에는 너무나 복잡하고 내가 어찌 해볼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드는 일들이 많다. 잊으려는 것. 하지만 잊을 수 없는 것. 매우 불안정한 상태로 무의식적으로 잊으려고 하지만 잊을 수 없는 것. 오늘도 회사에서 너무 스트레스 받으면서 일하던 도중 지금 일을 하고 있는 '도중'이기 때문에 난 생각을 못하지만 이럴 때야 말로 멈쳐서 다시 한 번 내가 이렇게 까지 살면서 돈을 벌어야 하나 생각할 '순간'이 아닌가 싶었다.
매우 여운이 긴 공연인데 마침 친구들을 만나서 그 여운을 혼자서 즐기지 못했지만 이렇게 자루스키와의 인증샷을 찍었다!!!!!LG아트센터가 요새 아주 잘 한다. 이런 기회를 계속 계속 마련하라!!!!! 난 그래서 또 되먹지 않은 불어로 je suis tombe amoureux vous chanter 말도 안되는 불어 하고 아아 당신은 세계에서 인간문화재로 지정해서 보호해야 합니다. 넋을 잃고 홀려서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카운터테너 필립 자루스키. 존경스럽습니다.